38선은 누가 그었고, 해방된 사람들은 무엇을 바랐을까?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았습니다.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기뻐했고, 오랫동안 빼앗겼던 나라를 이제는 우리 손으로 세울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새 정부가 바로 세워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라를 어떻게 운영할지, 누가 이끌지 정해지지 않은 사이 여러 지역에서 한국인들이 먼저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동네의 치안과 식량 문제를 살피고, 새 나라를 준비하려는 움직임이었죠.

대표 사진은 해방 당일 서울 거리의 시민들입니다. 호주 전쟁기념관(Australian War Memorial) 소장 자료 C324666으로, 원저자는 미상이며 Wikimedia Commons는 퍼블릭 도메인 자료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사진 원본과 이용 정보 · 호주 전쟁기념관 자료 기록

해방 뒤, 사람들이 직접 만든 조직

서울에서는 여운형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만들어졌습니다. 건준은 새 나라를 준비하는 한편 치안대를 꾸려 질서를 유지하고, 식량이 함부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살폈습니다. 건준의 지역 지부는 여러 곳으로 퍼졌고, 1945년 8월 말 전국에 145개 지부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건국준비위원회 해설

건준 지부가 인민위원회로 바뀌거나, 지역 사람들이 별도로 인민위원회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선거로 뽑힌 지방정부와 똑같은 조직은 아니었어요. 아직 정식 정부가 자리를 잡기 전, 주민과 지역 인사들이 동네의 치안과 식량 같은 문제를 맡아보려던 임시 조직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모든 조직의 구성원과 정치적 생각이 같았던 것도 아닙니다. 새 나라를 준비하려는 움직임 속에서도 누가 중심이 될지를 두고 갈등이 생겼습니다.

북쪽에서도 한국인들이 조직을 만들었다

38선 이북에도 건준 지부와 여러 지역 조직이 생겼습니다. 평양에서는 민족주의자이자 기독교계 지도자인 조만식이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끌었습니다. 그 조직에는 치안·교육·산업·생활을 맡는 사람들이 있었고, 민족주의자와 기독교계 인사뿐 아니라 사회주의 성향의 인사들도 참여했습니다. 함경남도처럼 사회주의자들이 더 활발하게 움직인 지역도 있었죠. 지역마다 조직의 모습과 힘의 균형이 달랐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북한 지역 인민위원회 자료

소련군이 북쪽에 들어온 뒤에는 함경남도의 조선인 조직이 지역 행정을 맡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소련군은 이를 받아들였고, 북쪽의 여러 지역 조직은 인민위원회로 정비되어 행정에 참여했습니다. 그렇다고 북쪽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운영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국인 조직이 먼저 활동하고 있었지만, 소련군의 점령 아래에서 조직과 정치의 방향도 점점 달라졌습니다. 1946년에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만들어지고 토지개혁 등 큰 사회 변화가 이어졌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북한 정권 형성 자료

남쪽에서는 자치조직이 인정받지 못했다

남쪽에서도 건준과 인민위원회가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남쪽에서 자신들 외에 다른 정부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건준을 잇는 조선인민공화국과 지역 인민위원회도 공식 통치기구로 인정하지 않았고, 남쪽의 행정권을 직접 행사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인들이 지역에서 꾸리려던 자치조직은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됐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미군정 해설

그러니 남북의 차이를 “한국인들이 스스로 움직였느냐, 아니냐”로 나누기는 어렵습니다. 양쪽 모두 한국인들이 새 나라와 지역 행정을 준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다만 미군정과 소련군정이 그 조직들을 서로 다르게 대했고, 그 차이가 남과 북의 정치·행정 구조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38선은 처음부터 국경이었을까?

1945년 9월 2일 발표된 연합군의 지시에는 38선 북쪽의 일본군은 소련군에, 남쪽의 일본군은 미군에 항복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미국이 제안한 분할 점령안을 소련이 받아들인 것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인들이 함께 모여 남북의 경계를 정한 것은 아니었어요. 이 선은 우선 일본군의 항복을 어느 군대가 받을지 나누기 위한 선이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미군정 해설

1945년 8월 14일 기준 한반도 지도에 당시 도 경계와 38도선, 남북 군의 진입 방향을 표시한 지도
도 경계는 국사편찬위원회 역사지리정보DB의 1945년 8월 14일 행정구역 자료를 바탕으로 표시했습니다. 38도선·지점·진입 방향은 본문 설명을 위한 개략 표시입니다.

지도에서 보듯 1945년 8월에는 소련군이 한반도 북부로 들어와 원산·함흥·평양까지 진출했습니다. 미군은 9월 8일 인천에 상륙해 서울로 들어왔습니다. 같은 한반도에 서로 다른 군대와 행정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소련군의 북부 진입 기록 · 미군의 인천 상륙과 서울 진주 사진 자료

미국 국무부가 1945년 11월 16일 발표한 자료도 38선을 일본군의 항복을 받기 위한 임시선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선이 한 나라의 통일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남북 사이의 통신과 무역, 사람들의 왕래를 다시 이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처음부터 영원한 국경으로 정한 선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미국 국무부 1945년 11월 16일 발표문

하지만 임시였던 선은 남북의 행정과 정치가 달라지면서 점점 넘기 어려운 경계가 되어 갔습니다. 1948년에는 남쪽에 대한민국이, 북쪽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세워집니다.

처음의 38선은 전쟁터의 전선이 아니었습니다. 일본군의 항복을 나누기 위해 그은 선이었죠. 하지만 그 선의 양쪽에서 서로 다른 군정과 정치가 자리 잡으며, 지도 위의 선은 점점 더 무거운 경계가 되어 갔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남과 북에 서로 다른 정부가 세워진 뒤, 38선 주변의 긴장이 어떻게 커졌는지 지도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참고 자료

  1. 국사편찬위원회,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
  2. 국사편찬위원회, 북한 지역 인민위원회의 성립과 개편
  3. 국사편찬위원회, 북한 정권의 탄생
  4. 국사편찬위원회, 군정의 실시(미군정청)
  5. 미국 국무부, 1945년 11월 16일 한국 관련 발표문
  6. 사진: Wikimedia Commons, Seoul on Independence Day in 1945 (Public Domain); 원자료는 Australian War Memorial C324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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